[13] 도형을 먹는 세상

2020. 8. 8. 09:46Writings/Stories

사제들은 이 사회에서 가장 높은 계층이다. 사제는 엄격한 생활 규칙 속에서 사회의 다른 모든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대신 가장 좋은 환경에서 가장 좋은 소모품을 제공받는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없는 정화의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것이 사제들을 태생부터 남들과 구별되게 만들고, 계층 구조가 절대 뒤집어지지 않을 이유가 된다.

 

나머지 계층과 소통하며 수확품을 공급받고 사제의 업무를 분배하는 일을 맡는 관리직 사제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제들은 폐쇄된 환경, 제한된 정보 속에서 평생 홀로 살아가며, 정해진 시간에 주어진 의무를 수행한다. 

 

***

 

ㅅㄷㅅ는 고위 사제가 되기 위해 수련 중인 중견 사제다. 그녀의 신전은 바다 근처 절벽에 걸쳐있는데, 더운 날씨 때문에 온통 흰 칠이 되어 있다. 혼자 있을 때는 사제임을 표시하는 돌목걸이 외에 아무 것도 입을 필요가 없다. 

 

"아 정말 무료해.."

난간에 기대 멍하니 바다를 보던 ㅅㄷㅅ는 문득 배가 고파졌다. 어제 보급된 식량이 많이 쌓여 있을텐데..

 

사람들은 선, 면, 입체 이렇게 세 가지를 먹고 살아가는데, 그 중 가장 최상급에 속하는 직선, 평면, 입체다각형이 우선적으로 사제들에게 배분된다. 그녀는 깔끔하게 펴진 평면이 들어있는 봉지를 잡아 뜯어 하나를 입 속에 넣었다. 

 

면은 즉석 식품으로 나오지만, 선과 입체는 직접 시간을 들여 재배해야 한다. ㅅㄷㅅ는 재배실로 선 씨앗 몇 개를 추렸다. 재배실의 네 벽은 선 씨앗을 심을 수 있는 밭이다.  ㅅㄷㅅ는 한쪽 벽에 빨대를 꽂고 씨앗 두어 개를 불어넣었다. 씨앗을 벽 속 적당한 깊이에 넣어두면,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싹이 튼다.

 

선은 벽에서부터 가로로 쭉 자라나는데, 이 때 너무 씨앗을 깊게 심으면 선이 벽을 뚫고 나오지 못해서 안에서 곡선이 되어 엉켜버리고, 너무 얕게 심으면 뿌리가 자란 선을 지탱하지 못해 아래로 꺾인 선이 되어 버린다. 사제는 항상 질좋은 직선만 먹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재배에 실패한 선들은 식량 수거함에 버린다. 

 

"기다리기엔 너무 배고픈데.."

다행히 전에 미리 심어둔 선이 몇 개 보인다. 직선으로 잘 자랐네. 얼른 따서 허기를 채웠다. 

 

입체도 마찬가지로 직접 재배해야 한다. 입체 씨앗을 적당한 온도의 물에 띄워놓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부풀어 깔끔한 다각형이 된다. 여기서 물의 온도가 너무 차갑거나 뜨거우면 제대로 부풀지 못하거나 너무 팽창해 찌그러진 도형이 돼버리는데, 이 경우 역시 먹지 않고 수거함에 버린다. 입체는 온도에 민감해서 재배 후에도 보관 기간이 길지 않다. 그래서 따서 모양이 일그러지기 전 몇 시간 안에 먹는 게 좋다. 

 

"입체는 하나 정도만 먹을까.." 

ㅅㄷㅅ는 그릇의 물에 손가락을 넣어 온도를 확인한 후 씨앗 하나를 띄워두었다. 입체가 부풀기를 기다리면서 평면 봉지를 몇 개 더 뜯었다. 봉지에 '1급 평면' 이라고 쓰여 있다. 

 

세 가지 음식 중 면은 가장 재배가 어렵다. 면의 씨앗을 우선 갈아서 가루로 만든 후에, 철판에 깔고 물을 뿌려 놓는다. 그러면 가루들이 서로 끈끈하게 엉겨 붙어 서서히 굳으면서 면이 된다. 이게 적당히 끈끈해져서 굳기 전에 숙련자가 제대로된 장비로 평평하게 펴줘야 하는데, 사람의 손으로 가루를 잘 밀고 뭉쳐 질이 좋은 평면을 만드는 게 쉽지 만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사제들이 먹는  평면은 대부분 숙련자들이 일하는 공장에서 제조해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나온다. 재배가 귀찮은 ㅅㄷㅅ에겐 편한 일이다. 

 

전에 딱 한번, 헝클어진 곡선을 수거함에 버리지 않고 먹어본 적이 있다. 특유의 고소함이 사라지고 쓴맛이 많이 나서 한입 먹고 버렸던 기억이 있는데...

 

사제들이 잘못 재배한 곡선과 찌그러진 도형은 한꺼번에 수거 되어 시중에 다시 유통된다. 일반인들은 조금 구부러진 곡선, 곡면, 찌그러진 도형을 주식으로 삼는데, 사제가 잘못 재배해서 수거함에 들어간 음식들은 오히려 '사제의 손을 탄' 프리미엄이 붙어 중급이나 하급 씨앗으로 재배된 음식들보다 더 비싼 값에 팔린다. 

 

 

***

 

사제들의 일은 정화다. 곡선이 되다 못해 실타래처럼 엉켜서 쓰레기가 된 선 더미를 직선으로 다리는 일, 너무 많이 찌그러져 면과 면이 맞닿아 붙어버린 입체에 숨을 불어넣어 다시 말끔한 입체 도형으로 되돌리는 것. 이 두 가지가 중견 사제들이 맡는 주요 업무다. 한번 일그러진 도형은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 이치인데, 사제들의 능력은 이 이치를 거슬러 아무런 가치가 없는 자원을 대가 없이 최상의 자원으로 되돌린다. 없어서는 안될, 귀한 능력인 것이다. 

 

사제들의 수는 제한되어 있고, 이들이 일정 시간 동안 정화할 수 있는 쓰레기 도형의 양도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가장 심하게 어그러져 정화가 급한 도형부터 차례로 사제들에게 맡겨진다. 

 

면을 정화하는 일은 중견 사제를 지나야 가능하다. 아니, 면을 정화하는 것이 가능해지면 그 때부터 중견 사제에서 고위 사제로 직급이 변경된다고 하는 게 맞겠다. 

 

선이나 정화할 때는 직접 손가락으로 선타래를 풀면 되고, 입체를 펼 때는 숨을 강하게 풀어넣어 입체를 안에서부터 팽창시킨다. 평소 쓰던 신체 기관을 그대로 쓰는 것이라 비교적 쉽게 익힐 수가 있다. 

그 에 비해 면을 정화하는 건 좀더 숙련도를 필요로 하는데, 구겨진 면 위에 손을 살짝 띄운 채로 손바닥으로 기를 발산해 구김을 펴야 한다. 처음 면을 정화하기 시작하는 많은 중견 사제들이 신체 기관으로 기운을 방출한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항상 물리적인 기반 위에서 생활에 왔는데, 갑자기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을 쓰라니..

 

ㅅㄷㅅ도 이제서야 작은 평면을 정화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고위 사제들이 어떻게 그 '기운' 이라는 것을 습득했는지 자료를 좀 찾아봐야할 것 같다. 

 

도서관에 들어가서 책장 옆을 쭉 걸으며 카테고리를 훝어보았다. 늘 그렇듯 찾는 정보로 곧장 가는 일이 없다. 책 제목을 보면 호기심이 발동해서 늘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읽다 시간을 보낸다. 한참 책장 사이를 걷던 ㅅㄷㅅ는 표지가 끌리는 책이 있어서 열어보았다. 

 

"마X크X프X ...?"

 

저쪽 세상에선 넓은 면 안에서 입체를 표현한 3D게임이라는 것이 있다는 데, 이 마X크X프X 역시 그런 게임들 중 하나라고 한다. 사진을 몇 장 보니 마치 우리 세상이 이상적으로 그리는 환경을 그대로 재현해놨다. 생명체들마저 순수하게 곧은 선, 면, 입체로 이루어져 있다니.. 그들도 오염되지 않은 도형의 가치를 아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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